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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한다"와 "사랑한다"사랑에관하여 2024. 6. 20. 17:53

책을 ‘사랑’한다는 건 대체 뭘까
‘좋아한다’와 ‘사랑한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엄마의 영향으로 책에 파묻혀 지냈다. 책장에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책들이 집안 곳곳에 쌓여있었다. 손만 뻗으면 새로운 책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 나는 당연스럽게도 매일같이 책을 읽었고 또 글을 썼다. 학교에서는 무슨 글짓기를 그렇게 시키는지 반강제적으로 독후감 대회와 각종 논술 대회에 나갔고 나는 매년 상을 탔다. 집에서는 밖으로 나돌며 책장만 피면 자버리는 오빠들과 다른 나를 내심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렇게 나에게는 책 많이 읽는 똑똑한 막내딸이라는 자부심이 내심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노답 사춘기 시기가 찾아오면서 나는 더이상 활자를 읽는 것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에게는 신문명이었던 애니를 접하게 된 것이다. 책을 읽을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충격적인 자극이었다. 책에 비해 서사가 아주 빠르게, 그것도 시각효과와 함께 전개되니 도파민이 쫙쫙 돌았다. 한동안 애니에 빠져서는 매일 밤을 새우고 학교에서는 하루종일 잤다. 그렇게 글짓기 상을 휩쓸던 초등생의 나는 점점 없어져갔고, 애니의 영향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져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방에 틀어박혀서는 온종일 이상한 만화를 보더니 피겨를 사모으고, 난데없이 미술을 한다고 며칠을 떼썼다. 진상이다.
그림을 배우다 두 달도 안돼서 난 학원을 때려치웠다. 중학교 3학년이었고, 스스로를 재능충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한계에 부딪혔던 것이다. 글짓기는 그냥 쉽게 쉽게 해도 성과가 좋았고, 공부도 전날 벼락치기 하면 그런대로 괜찮은 성적이 나왔다. 그런데 그림은 달랐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를 손으로 구현하는 게 너무 어려웠고 잘 못했다. 그렇게 나는 제대로 노력도 해보지 않은 채 아 몰라 배 째 상태가 되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중학생이 되었던 것.
그렇게 하고싶은 것도 없이 팽팽 놀기만 하던 노답 상태의 나를 중3 겨울방학 어느 날 엄마가 불러냈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갓 대학생이었던 21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전에 해주었던 이야기가 아직까지 엄마 인생의 지표라고 했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그 섭리를 따라 인생에도 똑같이 사계절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봄을 기다리는 겨울의 시기인 것이고, 열심히 일할 거리가 많다면 씨를 뿌리는 여름의 계절, 하는 것보다 성과가 좋다면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기에 겨울을 대비해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크게 실망하거나 크게 좋아할 필요가 없이, 본인이 어느 계절에 와있는 지만 인지하면 흔들 일 일이 없다고 한다. 대신 겨울의 시기에 너무 힘들고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다면 책을 꺼내라고 했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인생의 갈피를 못 잡을 때 책에서 답을 찾아보라고 했다. 정답을 알려주진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참고로 우리 엄마는 본인의 인생에서 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때의 나는 시시한 이야기로만 여겼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성인이 되고, 마음이 힘들 때마다 책을 찾게 되었는데 나는 이게 현실 도피인 줄만 알았다. 현실의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하니 책을 읽으면서 잠시 그 시간들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괴로움을 잠시 외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서를 한다는 행위 자체로 그나마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자위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가 책을 회피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책을 읽을 때 손톱 옆 가시 같은 아주 작은 불편함이 자라나게 된 것이다. 예전에 책을 좋아하던 시절의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책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볼 때면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늘 마음은 떨떠름했다. 책 읽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닌 일종의 현실 회피 수단으로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만 당당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묘하고 이상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맘 때쯤, 나는 사랑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늘 신성시하여 아주 대단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사랑이었는데, 마음을 조금 가볍게 먹기로 했다. 나의 시간을 마땅히 내어서 쓰고, 안 본 지 오래되면 보고 싶고, 보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고 싶고. 사랑이 별 거 없다고 생각했다. 내 가족, 친구, 애인, 내가 아끼는 물건, 좋아하는 행위 등.. 모든 것에 사랑이 묻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책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구나! 어린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이어진 책과 나의 긴 서사들을 그저 사랑으로 결론 내리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사랑을 거창하게 생각하던 지난날, 나 스스로가 정해둔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절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아쉽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사랑한다고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이미 사랑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쉽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어려워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좋아한다는 것이 일종의 ‘선호한다’는 개념이라면, 사랑한다는 것은 무언가 열정적인 것이 있어야만 타당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듯이...
*본 글은 위 세 가지 키워드를 주제로 에디터 '오니기리'이 발행한 콘텐츠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3X3 매거진과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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