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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 떨지않는 연말이 존재할까BINGO 2024. 6. 7. 17:28

12와 31
12월 31일. 모두가 종소리를 기다리며 낭만에 가득찬 하루를 보내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형체없는 불안감과 비참함이 곁을 맴돌며 한 해를 돌아보게끔 만든다.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원하는 자아상이 있고, 그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혹은 이미 그렇다고 착각해 마치 이상 속 자아를 본인인냥 흉내 내기도 한다. 나에게도 언젠가부터 ‘그래야만 하는’ 자아상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연말은 일 년의 대장정 속 이상적인 자아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졌는가를 심판하는 날이다. 마치 장기 여행자가 모든 여행 일정을 끝내고 마지막 날, 이번 여행은 최고였어, 하며 추억을 상기하듯이.
생각이 깊은 편이시네요
알고 있는 지식이 많으며, 새로운 일에 도전도 잘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전에는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 줄 착각하고 ‘척’하며 행동하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상상 속으로만 백번 도전하는 비겁한 방구석 찐따였고, 주위사람을 잘 챙기지도 못하고, 기껏해야 구글링과 각종 위키백과에서 잡지식들만 쌓아두고 있었다. 이런 나를 제대로 직시하게 된 계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난 후로부터다. 내 생각보다 똑똑하고 멋있는 사람들은 너무 많고 내일은 없는 듯 도전만 하는 사람들도 천지빽가리였다. 스스로가 생각이 깊고 신중하다고 여겨왔지만, 그 중에서는 귀찮아서 흘러가는대로 선택해버린 것들, 결정하기 싫어서 남에게 권한을 양도해버린 것들이 반이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12월 31일은 ‘너의 셀프 이상형에 가까워졌니?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라도 했니?’라는 판결의 날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있었어, 와 같은 변명말고 1년 간 정말 그런 행동들을 해왔는지 나를 도마 위에 얹어 놓는 것이다.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남에게 ‘나는 좀 그런편이야’ 하며 내 이상향 자아인 척한 모든 행위들이 실수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뱉었던 조금의 가학적인 말들이 자학으로 돌아오고, 진실 됐다고 믿은 순간들이 다 위선이 된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썼던 일기장 속 일 년의 문장들이 중2병 유치한 엄살로 둔갑해버리는 것이다. 쪽팔림이 손을 흔들며 나에게 달려온다..
뻔뻔한 사람이요
이러한 자책의 과정을 겪다보면, 뻔뻔함이 슬쩍 고개를 들이민다. 야 그래도 그정도면 됐잖아? 완벽한 사람이 어딨어, 하며 스스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12월 31일 세상은 너무나 시끄럽다. 당신의 한 해는 어땠나요? 내년은 어떻게 살 것인가요? 모두가 떠들어댄다. 그럼 다시 지난 날들의 과오를 떠올리며 죄를 판결한다. 게으른 죄, 비겁한 죄, 말만 나불거린 죄. 신을 믿었더라면 성당에 가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지만, 이 판결의 집행자와 죄수자 모두 나 자신이다.
새로운 한 해가 밝고, 출소한 죄수에게 건네지는 두부 한 모처럼 아침이 뽀얗게 느껴진다. 올해는 이 죄들을 세탁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고는 갱생의 아침을 맞는다. 새 삶을 다짐하는 수감자처럼, 자책 끝의 합리화와 자기위안을 거치며 나름 괜찮은 한해였지하며, 다시 새로운 해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형체없는 비참함과 쪽팔림은 하루살이처럼 사라져버린다. 허무하지만 그렇다고 건너 뛸 수는 없는, 명절에 가기싫은 친척집에 실려가는 그런 하루가 지나간 것이다.
호들갑 떨지마이소
수감과 출소의 날인 12월 31일,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본다. 호들갑 떨지말고 모두 모르는 척 했으면 좋겠다는 상상. 12월 31일이나 1월 1일이나 그저 같은 하루에 불과하지 않나요? 하며 반항하고 싶어진다.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덜할까 상상만 .. 상상만 하고 끝난다. 이쯤 되니 내 주위 사람들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어떤 날로 여기는지 궁금해졌다. 만만하게 물어볼 수 있는 지인 A,B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른 삶 훔쳐보기
A는 도전하는게 귀찮아서 뭐든 새로운 일은 최소화하는 편이다. 스스로가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좋으면 장땡이라는 단순하고도 솔직한 사람.
A는 12월 31일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냥 마지막 날이지 뭐. 맛있는거 먹는 날? 이라고 한다. 이미 질문을 들었을 때부터 큰 고민을 하지않고 떠오르는 대로 뱉은 듯 하다. 조금 더 쪼아대니 뭐가 더 나오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는 12월 31일이 너무 슬펐다고 한다. 한 살 한 살 먹어가는 것이 싫어서. 나이가 들수록 내가 해야만 하는 것들,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니 그걸 피하고 싶지만 피할 도리가 없어서 슬프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 이 짓거리도 매년 반복하다보니 그냥 무뎌졌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데 뭐 어뜨캐. (모든 워딩은 사실 그대로 표기했음)
B는 슈팅스타 같은 사람이다. 늘 새로운 자극을 추구해서 이곳 저곳 잘 돌아다니며, 누가봐도 나 해피해요를 공기로 뿜어내고 다닌다.
의외로 B는 12월 31일이 그닥 신나지 않는다고 했다.(누구보다 송년회와 연말파티를 많이 하지만) 내년을 또 어떻게 살아갈지 예측할 수 없는데, 왠지 계획을 짜야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어 싫다고 한다. 그래서 다이어리에 내년의 목표를 몇 자 끄적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덮고 놀러 나간다며 깔깔깔 웃었다. 실제로도 이런 광경을 옆에서 많이 목격했기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사람들이 반복하는 12월 31일의 행위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는데, 내 글을 읽고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냐며, 재밌다고 좋아했다. (긍정적인 의미로 칭찬한 것 같다. 아마도?)
남들은 12월 31일을 어떻게 보내나 궁금했는데, 다 즐겁게 연말을 즐기는 것 같아 보여도 속으로는 그림자가 슬쩍 지나가나보다. 어쩐지 위안을 얻었다. 올해는 큰 죄 없이 깨끗한 모범수로 보내고 싶다. 늘 그래왔지만, 올해도 다시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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